<초인수업> 니체의 위버멘쉬는

초인수업 니체의 위버멘쉬는


초인수업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저자 – 박찬국
발행 – 21세기북스 (2014)
페이지 – 268p

목차

프롤로그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첫 번째 질문 :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두 번째 질문 :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세 번째 질문 :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네 번째 질문 :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다섯 번째 질문 :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여섯 번째 질문 : “살아가는 데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일곱 번째 질문 :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여덟 번째 질문 :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아홉 번째 질문 :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열 번째 질문 :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에필로그 당신의 배를 미지의 바다로 보내라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인공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 산속에서 수행한 끝에 득도하여 속세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파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곧 니체 자신이고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니체의 다양한 철학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위버멘쉬(Übermensch)’는 초인(超人)을 뜻하는 말로 ‘~위에 있는 사람, 넘어선 사람’ 정도로 해석되는 니체의 대표 사상 중 하나다.

니체의 위버맨쉬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안락함을 추구하는 대신 삶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어야 이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락한 삶 = 행복한 삶’이라는 전제는 옳지 않으며 고난을 극복하는 삶이야말로 바람직하고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형태이며 곧 우리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초인 수업> 본문에는 살면서 누구나 질문해볼 수 있는 삶에 대한 10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등장하다. 각 질문에 대해 니체의 초인 사상의 관점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인생이 힘든 이유부터 행복해지는 방법, 안락한 삶 대신 진정한 삶의 의미 찾기, 종교에 관한 생각, 자신만의 개성을 만드는 법 등이 있다. 이를 통해 니체의 위버맨쉬 사상, 즉 어째서 인간은 안락한 삶 대신 진취적인 삶을 추구해야 하는 지에 관한 구체적인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위버멘쉬(Übermensch)란?

위버멘쉬는 초월한 사람의 뜻이 있지만, SF 영화에 나오는 슈퍼맨 같은 초능력을 가진 초인이 아닌 현실에서 삶의 고난이나 역경을 초월하는 정신을 말한다. 이것은 19세기, 당시 견고했던 국가종교체계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사는지 그 답을 찾고자 할 때 니체가 기존 종교적 세계관을 부정하며 제시한 바람직한 인간상이다. 그는 진정한 행복은 안락한 평안한 삶이 아닌 어려움을 뛰어넘는 초인 정신에 있다고 보았다.

니체의 이전 저서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면 사람의 단계는 낙타, 사자, 아이 세 단계로 나뉘는데 아이처럼 긍정하고 놀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단계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각 단계를 보면 먼저 짐 싣는 것에 익숙한 낙타는 순종하는 삶이고 사자처럼 저항하는 것은 권위에 맞서는 저항하는 삶이지만, 아이는 모든 것에 가능성이 열려있고 삶을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즉 누구나 삶이 재미없을 때는 삶의 의미를 묻겠지만, 반대로 재미있을 때는 그런 질문 없이 마치 아이처럼 삶을 즐길 수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의 단계가 되었을 때야 말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즐기며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순종적인 낙타의 삶이나 그저 저항하기만 하는 사자가 아닌 모든 단계를 뛰어 넘어 놀이처럼 삶을 즐기는 아이의 단계)

본문에서는 만약 우리가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거나 집착한다면 이것은 고대 사회로부터 이어져 온 ‘노예근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따르고 주인의 평가를 들어야 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므로 바람직한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평소 과도하게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려면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개성 있는 꽃을 피워내야 한다. 만약 삶이 단조롭거나 권태롭다면 이는 새로운 도전을 하거나 무언가 변화를 주어야 할 시기임이 틀림없다. 초인 정신을 발휘해 노력한다면 자신만의 개성과 능력을 찾아 발전시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앞에서 잠시 이야기했던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단, 이는 ‘남이 어떻게 바라보든 My Way만 간다, 누가 뭐라 하든 귀를 닫겠다’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초인수업> 감상

책을 읽고 과거의 자기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한때 어떠한 도전 의식도 없이 적당히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나태하고 시간을 허비했던 삶을 살았던 적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에 안주하는 모습이었겠다. 당시에도 스스로 한심하다고 느꼈고 이후 목표가 생겼을 때는 과거를 반성하고 착실하게 준비해서 성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도전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난이 있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잘 이겨내고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때 느낀 성취감은 말할 수 없이 크고 시간이 지나도 그때 느낀 감정은 잊히지 않는다. 아예 삶의 자부심 중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도 드는데 나중에 다른 일을 하거나 새로운 목표가 생겨 매진할 때도 지난 경험을 원동력 삼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를 생각해 보면 순수하게 목표를 생각하고 즐기면서 준비했던, 위버멘쉬 사상에서 나오는 아이의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초인수업>을 읽었을 때, 니체의 위버맨쉬 사상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스스로 전의 나태한 상태를 벗어나 무언가 즐기면서 성취했을 때의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니체의 위버맨쉬 사상도 항상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니체가 원래대로 교수가 아닌 21세기 대한민국 자영업자이고 코로나로 힘든 경험을 했어도 줄곧 위버맨쉬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이 사상은 니체가 활동하던 당시 상황이나 환경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라서 21세기 사람들의 삶에 언제나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만약 정말 힘든 사람에게 ‘고통을 받아들이고 인생이 가혹하기를 바라라’고 조언하면 어떻게 될까? 현실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이런 부분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삶에서(‘지금의 삶’이라는 것이 반드시 안락한 삶이 아니라는 것은 니체가 이해해야 한다) 무언가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는 바람직해 보인다. 무언가 진취적으로 도전하고 노력하는데 이것을 즐기기까지 한다면 그 사람의 환경은 앞으로 계속 나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삶의 중심 역시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있으므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자존감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줄곧 이야기하는 ‘운명을 바꾸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