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중국어 말하기 대회

09. 중국어 말하기 대회

5월 초였나, 학교에서 중국어 말하기 대회(演讲比赛) 소식이 들려왔다. 원하는 학생은 누구든 참여할 수 있었는데, 중국어 실력과 자신감이 오르겠다는 생각에 바로 지원했다.

대회는 A~D반, E~G반 학생들이 그룹별로 한 명씩 연설하는 방식이었다. 신청을 마친 참가자는 자신을 소개하는 간단한 영상이나 사진을 만들어 파일로 제출해야 했다.

피처폰을 제외하면 노트북이나 USB 같은 전자 기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마음 먹으면 주변에 빌릴 수 있었겠지만, 자료를 만드는 일이 내키지 않았고 번거롭기도 해서 결국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설 원고만큼은 정성 들여 작성했고 약 일주일 남은 대회까지 매일 수업 후 기숙사에서 시간을 들여 원고를 외웠다. 대회 당일 오전에는 중국인 대학생 친구 J와 만나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외운 원고도 보여주었다.

J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표현이 많이 부족하다며 교내 빈 강의실로 이동해 그 자리에서 노트 한 장을 찢어 기존 내용을 바탕으로 새 원고를 써주었다. 하지만 막상 J와 헤어지고 기숙사로 돌아온 뒤에는 두 원고를 두고 잠시 고민했다.

결국 익숙하지만 부족한 원고 대신, 낯설지만 중국어 표현이 훨씬 유창한 J의 원고를 선택했다. 모르는 단어는 찾아가면서 대략 2시간을 들여 최대한 내용을 다 외우고 보니 대회까지는 1시간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그대로 새 원고를 챙겨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대회 장소인 류원으로 향했다. 대회장 안에는 어학연수생 말고도 본과 외국 학생이나 처음 보는 중국인 선생님 등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사회자의 개막 인사와 함께 대회는 성대하게 시작되었다.


먼저 A~D반 참가자들이 무대로 나와 인사했고 한 사람씩 대형 스크린으로 소개 영상 방영 후 중국어 말하기를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 새로 외운 원고 내용을 떠올리느라 연설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거짓말같이 모든 발표가 끝났다.

짧은 휴식 시간 뒤, 이번에는 E~G반 학생들이 한 번에 무대로 올라와 관객석에 인사했다. 여전히 원고 내용을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정신없었지만, 어찌어찌 사람들을 따라 애써 웃으며 인사는 잘 마쳤다.

이후 다시 자리로 돌아와 사람들의 연설을 들었는데, 다들 소개 영상도 잘 준비했고 중국어도 유창해서 다소 마음이 위축되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례가 되어 무대 위에 올라갔고 무대 인사와 심호흡을 한 뒤 바로 연설을 시작했다.

말을 잘했던 것은 딱 첫 문장까지였다. 분명히 연습할 때는 끝까지 잘 나왔는데, 급하게 외운 탓인지 두 번째 문장부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멍해졌지만, 그렇다고 도중에 포기할 수도 없어서 결국 원고를 보고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

중간에 한 번씩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보면 무심한 표정이 많아서 여전히 긴장은 풀리지 않았고, 시간도 길게 느껴졌다. 다행히 얼마 뒤, 긴장되는 원고 읽기를 마치고 겨우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박수는 받았지만, 기진맥진한 상태가 돼서 다음 참가자들의 연설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 같다.

대회 이후 기숙사에 돌아온 뒤로는 얼마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결과적으로 퍼포먼스도 좋지 못했고, 기분도 우울해져서 공부나 외출 의욕이 떨어진 이유에서다. 하지만 원고를 써준 J에게는 고마웠다. 만약 일주일 전 J를 만났다면 이날 결과는 크게 달라졌겠지만, 대회 참여 자체에 후회는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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